점심시간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가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메모를 받고
외출증을 끊어
문을 나선다.
어머니가 웃으며 손을 흔드신다.
옥상에 모여 담배를 피우던
녀석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이런저런 먹을거리니 담배를 사오라며
애절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스파르타식에 가까웠던 재수학원 근처의
작은 식당에 앉아
어머니와 난
매운 오뎅찌게와 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조미료를 너무 많이 쓰는 식당이라며
어머니께선 한숨을 내쉬시고
난
여긴 좀처럼 오지 않는 곳이니 걱정하지 마시라며
거짓말한다.
어머니를
엄마를
배웅하고
돌아가는 길에
피우지도 않는 담배 한보루를
티셔츠 안에 밀어넣고 감춰넣고
과자 부스러기를
양손 가득 사든다.
가파른 언덕길을 터벅터벅 걸어 오르며
언젠가는
이 시간들도 모두 지나가겠지
라고 생각한다.
학원엔 삼십대중반의 부산 사람이
늦은 공부를 하겠다며 와있었다.
툭하면 내게
넌 딱 봐도 이과체질이 아니니 당장 문과로 옮겨야 한다느니
서울남자들은 약아빠져서
영 대통령감이 못된다느니
돈 버는 건 마음만 먹으면 정말 쉽다느니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하루는
어찌나 그 이야기들이 귀찮고 지겹던지
말없이 귀에 이어폰을 꽂아버리자
빼앗아 들어보더니
이까짓게 무슨 제대로 된 음악이냐며 비웃고는
진정한 음악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자신이 꼬마였을때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조용필이
부산 인근의 한 섬에서 목청을 가다듬던 모습을 본 일이 있다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어린 자신의 눈에도
정말 신기들린 사람 마냥
끝없이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는 그 모습을 보며
저런 자세야말로 진정한 가수의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너도 취미로 음악을 만든다던데
그거 한번 들어보자고 하길래
손사래를 쳤더니
버럭 화까지 내가며
자신이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특별히 감정을 해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점심시간.
지긋이 눈을 감은채
카셋트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들을
들어본 그는
전.혀. 영혼이 담기지 않은 음악이니
이런걸 만들고 있을 시간에 미적분 문제 하나를 더 풀라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주위 친구들이 웃었고
난 겸연쩍은 표정으로
카셋트 테이프를 빼앗아 가방에 던져 넣었다.
그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보기에 따라서
누군가에겐
'고작'
시험에서의 낙방이었겠지만,
아무것도아닌작은잠시의 지연 이었겠지만,
어쨌거나
십대였던 당시의 나에겐
무척 힘들게
느껴지던
반복되는
실패를 경험하며
아무것도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간이고
느끼는날들
이었다.
내가 노력하지 않는 이상
뜻대로 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아침에눈을뜨는순간부터다시눈을뜨는순간까지
겪어야했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굳이
온몸에새겨넣던 시절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나의 노력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주위의 도움으로
뜻하지 않은 바까지 얻는 경우도 많았고
노력이 항상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난
그 학원 안에 갇힌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 들 때가 있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약간이나마 확장된 자유였을까
혹은 명확치도 않은 막연한 꿈들을 이루어줄 역시나 불투명한 기회들이었을까
아니면
보다 교묘하게 포장된 안전한 모험이었을까.
누군가는 내가
일에 작업에 혹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며 움직이는 삶에
중독되어있다며
걱정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내가
너무 나른하거나 게으르다고
너무 낙관적이고 늘어져 있다며
때론
정반대로
지나칠정도로 비관적이라며
질책하기도 한다.
난 종종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같은 우려와 질책을 들으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눈동자를 마음 속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보게 된다.
사실
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보았다고 느끼는 것은 적지 않다.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300'을 모니터에 띄어놓고
동시에 김훈의 소설을 읽으며
문득
든
생각들 이다.
함께 시간을
일상을
나누는
친구들이
새삼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보고싶다.
언젠가는
이 시간들도 모두 지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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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고등학생시절, 어느 검정바탕의 웹사이트에서
읽었던 글.
언젠가 꼭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도, 한번이라도 더 따뜻해지고 싶었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 시간들도 모두 지나가겠지."
2015년. 모두 건강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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